혹자는 뽀로로를 두고 ‘위대한 발명품’이라 했다. 하기야 발명품이 뭐 별건가. 우리의 삶을 보다 이롭게 바꿔주는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뽀로로는 아이 키우는 엄마들에게 둘도 없는 발명품이 틀림없다. '뽀로로'가 방영되는 10여 분 동안은 폭력이나 비속어 걱정 없이 맘 놓고 고단한 육아에서 잠시 쉴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뽀로로는 토마스, 맥퀸, 파워레인저, 머피 등 숱한 캐릭터 사이에서 당당히 빛나는 ‘메이드 인 코리아’다. 종종 미국 교포들에게 “뽀로로 덕에 아이가 한글을 잘 배웠다”는 감사의 편지까지 받는다니 이쯤이면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겠다. 자, 그럼 이 시대의 발명품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김일호 대표에게 들어보자.
발견 01 엘리트 미술학도, 어린 시절 그 노래가 그립다
“지금도 노래방 가면 나이 마흔이 훌쩍 넘어 만화 주제가를 부르는 친구들이 있잖아요. 얼마나 머릿속에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으면 30~40년 지난 지금까지 노래를 부르겠어요. 아이들에게 애니메이션은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생각의 틀을 만들어주기도 하죠.” 오콘의 김일호 대표, 그가 유아 애니메이션 산업에 뛰어든 핵심적인 이유다.
그의 어린 시절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토요일 아침이면 '미래소년 코난', '은하철도 999'를 보기 위해 TV 앞에서 동생과 한참을 기다리며 꿈을 키우기도 했다. ‘철이’라는 번역된 이름만 듣고 '은하철도 999'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이라고 철석같이 믿다가 ‘메이드 인 재팬’임을 알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생각에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했고, ‘언젠가는 작품을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내겠다’는 꿈으로 영화 동아리 활동도 이어갔다. 하지만 그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사회에 발을 디디면서 그 꿈도 잊혀갔다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첫 번째 발견의 순간이 왔다.
“회사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갑자기 맞은편의 과장과 수석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한 분은 저보다 10년 선배, 다른 한 분은 20년 선배였죠. 결국 그들의 모습이 내 10년 후, 20년 후라고 생각하니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오랜 시간 꿈꾼 디자이너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묻고 또 물었다. 결국 과연 나는 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나? 과연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은 뭔가? 그 일이 돈을 벌어다주는가?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해주는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지 며칠 만에 그는 대기업 직장인 생활 2년에 종지부를 찍고 문을 나섰다. 그에겐 잠시 잊혔던 꿈,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발견 02 퇴직금 400만 원으로 산 매킨토시 한 대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퇴직은 500만 원이 전부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매킨토시 한 대를 사서 오피스텔에 들였다. ‘오콘’의 전신 ‘오컨설팅’의 시작이었다. 밖에서야 나이스한 컨설팅 회사인 줄 알았겠지만, 알고 보면 오피스텔에 나 홀로 근무하는 1인 회사였다. 그 모든 것이 크리에이티브를 파는 회사였기에 가능했다.
“처음부터 애니메이션을 시작했죠. 그런데 애니메이션이라는 산업이 개발에서 성공까지 족히 10년이 걸리는 거예요. 결국 돈을 벌어야 투자가 가능했어요. 비즈니스는 돈 버는 일을 하고, 그 돈으로 애니메이션을 해야 했죠.” 꿈과 현실의 적절한 조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IMF를 겪으며 안전하다 믿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사업과 나의 브랜드를 가져간다는 게 동시에 이뤄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당시 읽은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어차피 가시밭길을 걸어갈 거라면, 여러모로 내 브랜드를 만드는 일을 늦출 이유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건데 크게 두려울 것도 없겠다 싶었죠.” 어찌나 독하게 마음을 먹었는지, 그가 처음 한 일은 좋은 클라이언트들과 결별한 것이었다. 조그만 바늘구멍이라도 있으면 또다시 안락한 유혹이 될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버릇을 들인 시간만큼 고치는 시간이 는다는 그의 말처럼 말이다. 그런데 진짜 해보니 정말 어려웠단다.
뽀로로 profile
2003년 데뷔. 2005년부터 4년간 국내 애니메이션 시청률 1위. 월트디즈니에 직배 계약한 첫 국산 애니메이션. 작년 1년간 라이선스 수입만 약 100억 원. 현재 90여 개국에서 방영 중.
선물공룡 디보 profile
2006년 말 데뷔. 방영 1년 만에 100개국 수출 결정, 북유럽과 남미에서 특히 인기! 현재까지 국내외 라이선스 수입만 약 40억 원.
발견 03 하늘을 날고 싶은 아이들의 꿈을 보다
회사 이름을 오콘으로 바꾼 뒤 본격적으로 유아 애니메이션 산업에 뛰어들었다. 3년여 만에 탄생한 첫 작품은 펭귄을 모티프로 한 뽀로로. 오직 캐릭터 개발만 놓고 긴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것 한 가지! 메이드 인 코리아의 메가 히트 캐릭터 뽀로로는 왜 하필 펭귄일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 중에서 고르는 게 안정적일 거라 생각했죠. 좋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잖아요. 그중에서 펭귄은 뒤뚱거리는 모습이 마치 자기 모습을 보는 양 아이들이 쉽게 감정이입을 하죠.” 또 다른 펭귄 캐릭터 핑구와 차별화된 뽀로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가 말하는 좋은 유아 애니메이션의 조건이 뭘까? 첫째 아이들의 ‘호감’이고, 다음은 그 안에 담긴 내용, 즉 교육적인 면이다. ‘뽀로로 시리즈’ 중 가장 유명한 '하늘을 날고 싶어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날지 못하는 새 펭귄인데도 하늘을 날고 싶었던 뽀로로는 매일 하늘을 나는 연습을 한다. 물론 매번 떨어지기 일쑤. 수없이 떨어지던 어느 날, 그만 미끄러져 물속에 첨벙 빠졌는데 그곳에서 드디어 날게 된 것이다. 하늘이 아닌 물에서 난 것이다. 뽀로로는 우산이 비도 피할 수 있지만 멋진 악기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하늘뿐 아니라 바다에서도 날 수 있다는 ‘YOU CAN DO IT’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뽀로로의 느릿느릿한 말투는 또 어떤가. 말의 의미를 깨우쳐가는 아이들처럼 아이들이 알아듣고 기다려주길 바라는 철학이 깔려 있다. 아이들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 무엇! 결국 재미와 교육, 비주얼과 철학이라는 밸런싱이 메가 히트 브랜드 뽀로로를 탄생시킨 본질이다.
발견 04 최고의 것을 주고픈, 부모라는 마음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진 캐릭터는 다시 주소비자인 아이들에게 파일럿 테스트를 받는다. 아이들이 화면 앞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는가, 얼마나 집중도를 보이는가가 히트의 조건이다. 화면을 보다가 자꾸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면 캐릭터 자체가 매력이 없다는 얘기다. 파일럿 테스트의 주인공은 당시 세 살이던 김 대표의 아들을 비롯해 뽀로로를 만들어낸 스태프의 자녀들이었다.
“계획하고 진행한 건 아닌데, 우연히 뽀로로 개발에 참여한 주요 스태프들이 대부분 젊은 엄마, 아빠였어요. 그게 가장 좋은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라는 본질에 근접할 수 있었던 거죠.” 보다 열정적이고, 보다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작 와이프(크리에이티브 팀장)와 사내 커플인 그도 마찬가지였다. 경영자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매일 밤 집에서 다시 만난 부부는 뽀로로의 보완점을 놓고 토론을 이어갔단다. 그러다 보니 뽀로로는 자연스레 폭력도 없고, 비속어 하나 없는 참 착한 아이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김 대표가 짚는 뽀로로의 성공 요인이다.
“한국 부모들이 좋아하지 않는 걸 어떻게 외국 부모들이 좋아하겠어요? 안에서 히트 치지 못했는데 밖에서 히트 치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글로벌을 지향하지만 본질은 국내죠. 결국 한국 고객들을 만족시키는 과정이 우리 브랜드가 글로벌해지는 과정이에요.” 그 핵심은 부모의 마음이다.
발견 05 토마스는 40년, ET는 50년, 그럼 뽀로로는?
3년 넘게 공들였건만 뽀로로는 TV 데뷔 후 2년간은 말 그대로 잠잠했다. 2006년 교육적인 면을 강화해 데뷔한 선물공룡 디보도 마찬가지. 모두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았기에 반응도 늦은 것이다. 뽀로로와 디보는 데뷔 3년 만에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다. 캐릭터 콘텐츠의 생명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김 대표는 여기까지는 1차 관문 통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캐릭터가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최소 10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직 뽀로로는 일곱 살, 디보는 세 살이다.
1년간 라이선스 수입만 100억 원(뽀로로), 1년 만에 100개국 수출 결정(디보)… 그간의 신문 기사를 떠올린다면 욕심이 과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겠다. 하지만 살짝 고개를 돌려보자. 아이들이 좋아한느 토마스는 얼추 마흔 살, ET는 쉰 살이 된 캐릭터들이다. 그 캐릭터를 좋아하던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 자기 아이들에게 보여주려면 족히 30년은 기본이다. 그런 까닭에 김 대표는 뽀로로와 디보가 아이들 곁에서 50년, 100년 좋은 친구로 자라주길 바란다. 애니메이션에서 벗어나 키즈 라이프 브랜드로 말이다.
김 대표는 요즘 2011년 여름 시즌에 개봉할 '뽀로로' 극장판 영화 작업에 한창이다. 인터뷰하러 간 사무실에도 벽면 가득 콘티가 붙어 있다. 전 세계 캐릭터계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알려준 뽀로로처럼, 이 또한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이 될 것이다. 끝으로 뽀로로와 디보에 이을 제3주자는 ‘승용 캐릭터’가 될 거라 귀띔한다. 얼른 나와서 토마스와 맥퀸에 빠진 아들 녀석에게 오리지널 캐릭터를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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